[사물 제안서 #003] 내 손톱과 인내심을 앗아간 간장 뚜껑의 가학적 설계에 대하여

주방은 평화로운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어제 저녁, 불고기 양념을 만들려던 나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 하나 앞에서 무너졌다. 새로 산 간장병의 뚜껑을 여는 그 짧은 순간, 내 엄지손톱 끝은 하얗게 들떴고 날카로운 플라스틱 고리는 무심하게도 툭 끊어져 버렸다. 뚜껑 속의 속마개는 여전히 굳건히 닫힌 채 나를 비웃고 있었다. 결국 나는 요리를 멈추고 가위를 가져와 그 마개를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2] 비누를 질척이는 슬라임으로 타락시키는 받침대의 설계 오류

어느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새로 산 수제 비누의 은은한 향기를 기대하며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상쾌함이 아니라 지독한 불쾌함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단단하고 매끄러웠던 비누가, 받침대 바닥에 찰떡처럼 눌어붙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생명체가 되어 있었다. 비누를 집어 드는 순간 ‘찌익’ 소리를 내며 늘어나는 그 투명하고 끈적한 점액질, 이른바 비누 콧물을 마주할 … Read more

[사물 제안서 #001] 밤마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충전 케이블의 비극과 재설계

새벽 2시 15분. 사방이 고요한 방 안에서 들리는 건 내 얕은 숨소리와 창밖의 먼 차 소리뿐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머리맡에 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은 여전히 어두컴컴하다. 어제 분명히 꽂아둔 충전 케이블이 범인이었다. 선을 살짝 건드리자 그제야 ‘띠링’ 소리를 내며 충전 표시가 뜬다. 하지만 손을 떼는 순간 다시 화면은 암전된다. 나는 다시 그 지옥 같은 … Read more